
동물 포스터에 끌려서 예고편을 틀었다가, 사람이 동물 탈을 쓰고 동물원에서 연기를 한다는 기발한 설정에 피식 웃으며 예매 버튼을 눌렀습니다. 솔직히 이건 전혀 예상 밖의 전개였습니다. 극장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냥 두 시간 내내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웃고 나오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머릿속에 생각보다 할 말이 꽤 많아졌습니다.
동물원 코미디라는 신선한 소재의 명과 암
이 영화는 많은 분이 아시다시피 동명의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만 원작의 방대한 줄거리를 그대로 스크린에 옮기기보다는, '망해가는 동물원을 살리기 위해 직원이 동물 탈을 쓴다'는 핵심 세계관과 설정만 빌려와 영화만의 독립적인 서사를 새로 구성했더군요. 원작이 있는 작품을 재창작할 때는 기존 팬덤의 기대치와 신규 관객의 몰입도를 모두 잡아야 하는 숙제가 있는데, 설정 자체를 영리하게 가져온 점은 초반 흡입력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이 영화의 제작사가 2019년 <극한직업>으로 무려 1,600만 관객을 동원했던 '어바웃필름'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영화를 보기 전 기대치가 자연스럽게 머리끝까지 올라갔습니다. 전작에서 보여준 짜릿한 병맛 코미디의 진수를 이번에도 맛볼 수 있겠구나 싶었죠. 일반적으로 같은 제작사의 흥행 공식이 이어질 거라 기대하기 쉽지만, 제가 직접 경험해 본 <해치지않아>는 전작과는 결이 완전히 다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상업 동물원의 현실을 씁쓸하게 깔고 시작하는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실제로 국내에서 동물 보호와 연구를 제대로 병행하는 대형 기관들을 제외하면, 수많은 중소형 상업 동물원들은 오직 관람 수익에만 의존하다 보니 심각한 재정난과 경영난에 시달리곤 합니다. 영화는 이 무거운 현실을 이야기의 시발점으로 삼아 코미디 뒤편에 묘한 리얼리티를 부여합니다.
웃음의 연출 방식, 극한직업과 무엇이 달랐나
<해치지않아>의 연출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코미디 장르의 핵심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유머의 완급조절' 방식입니다. 대사와 행동이 치고 빠지는 박자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영화의 전체적인 톤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전작인 <극한직업>이 쉴 새 없이 터지는 빠른 말장난과 찰진 티키타카로 관객이 딴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았다면, <해치지않아>는 정반대로 호흡을 꾹 누르며 속도를 늦추는 느림의 미학을 선택했습니다. 관객이 '여기서 대사가 나오겠지?' 하고 예상하는 타이밍을 의도적으로 비틀어 버림으로써, 그 어색한 정적과 의외성에서 실소를 자아내게 만드는 구조입니다. 관객의 기대를 기분 좋게 배반하는 영리한 코미디 기법인 셈이죠.
문제는 이런 엇박자 코미디가 성공하려면 느려진 호흡만큼 웃음 포인트 자체가 밀도 있게 탄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템포가 느려지면 관객의 시선이 그 장면에 오래 머물기 때문에, 만약 유머가 타율 높게 터지지 않으면 자칫 극 전체가 루즈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위험이 큽니다. 아쉽게도 이 영화는 그 아슬아슬한 균형을 러닝타임 내내 일관되게 유지하지는 못했습니다.
실제로 극장 소파에 앉아 영화를 따라가다 보니 이런 흐름이 확연히 느껴졌습니다. 가짜 동물들이 관람객을 속이는 초반부 설정은 참 신선하고 흥미진진하게 흘러갑니다. 하지만 중반부 이후부터 온갖 사회적 메시지들이 급작스럽게 끼어들면서 극의 유쾌한 리듬이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동물 복지, 비정규직의 애환, 환경 파괴, 대기업 권력의 부조리까지 2시간짜리 오락 영화에 너무 많은 숙제를 쑤셔 넣으려다 보니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의 집중력이 흩어지고 결말마저 다소 급하게 훈계조로 마무리 짓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코미디 영화라는 본질에 조금 더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배우들의 눈부신 연기, 그럼에도 남는 아쉬움
다행히 극을 이끌어가는 배우들의 퍼포먼스 자체는 관객을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생계형 수습 변호사에서 얼떨결에 동물원 원장이 된 태수 역의 안재홍 배우는 특유의 억울하면서도 뻔뻔한 연기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소화해 냈고, 전임 원장 역의 박영규 배우는 시그니처와도 같은 목소리 톤과 허탈한 표정으로 짠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배우가 가진 본연의 매력과 극 중 캐릭터가 아주 착 붙는 훌륭한 매칭이었습니다.
특히 요즘 코미디 영화에서 흔히 소비되는 자극적인 욕설이나 남을 깎아내리는 가학적인 유머 없이, 온 가족이 얼굴 붉히지 않고 편하게 볼 수 있는 순한 맛 유머로 영화를 가득 채운 점은 칭찬하고 싶습니다. 무해한 웃음을 지향하는 감독의 따뜻한 시선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다만, 잘 나가던 동물원 이야기에 대형 로펌의 복잡한 이권 다툼 서사가 뜬금없이 끼어드는 후반부 구조는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였습니다. 관객이 기대한 건 귀여운 동물 탈을 쓴 사람들의 엉뚱한 소동극인데, 갑자기 법정 드라마 같은 분위기로 전환되니 겉도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죠. 게다가 예고편에서 가장 기발하고 재밌어 보였던 북극곰의 콜라 마시는 장면 등이 본편의 핵심 유머의 전부였다는 사실도 실제 관람 과정에서 김을 새게 만들었습니다. 맛있는 반찬을 예고편에서 미리 다 맛보고 정작 메인 요리를 먹을 땐 감흥이 떨어지는 딜레마에 빠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형 행동을 보이는 철창 속 동물들의 모습이나 관람객들이 던지는 쓰레기 등 동물원 내부의 복지 문제를 넌지시 던지는 연출은 가슴에 은은한 여운을 남깁니다. 가짜 동물들을 통해 진짜 동물들의 고통을 돌아보게 만드는 역설적인 효과만큼은 확실히 성공한 셈입니다.
결론적으로 <해치지않아>는 참신한 소재와 연기 잘하는 배우들을 한 바구니에 담아두고도,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엮어내는 연출의 뚝심이 조금 부족했던 아쉬운 수작입니다. "러닝타임 내내 배를 잡고 구르는 폭소를 원한다" 하시는 분들께는 다소 심심할 수 있겠지만, 주말 오후 자극적이지 않고 가볍게 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소소한 생각거리 하나쯤 남기고 싶은 분들이라면 한 번쯤 감상해 보셔도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