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6년 백두산 대분출 당시 화산재가 일본 홋카이도까지 날아갔습니다. 그린란드 빙하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이 산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는 게 실감 났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역사적 기록들을 찾아봤는데, 실제 규모가 더 무서웠습니다.
실제 백두산 화산이 터지면 어떻게 될까
백두산은 지금도 살아 있는 활화산입니다. 활화산이란 현재도 화산 활동이 진행 중이거나 재분출 가능성이 있는 화산을 의미합니다. 죽은화산인 사화산과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영화가 현실감 있게 다가왔던 것도 이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피해 시나리오를 들여다보면 영화보다 더 끔찍합니다. 화산재(volcanic ash)란 분화 시 분출되는 지름 2mm 이하의 미세 암석 입자를 말하는데, 용암보다 오히려 더 넓은 범위에 피해를 줍니다. 국립방재연구원에 따르면 백두산이 폭발할 경우 동북아시아 전역의 항공로가 마비될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출처: 국립방재연구원).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백두산 정상의 화구호인 천지에는 약 20억 톤의 물이 담겨 있습니다. 화구호란 화산 분화구에 물이 고여 형성된 호수를 뜻합니다. 전문가들의 추산에 따르면 대규모 분출이 발생할 경우 이 물이 1시간 20분 만에 일제히 방류되면서 북한 양강도와 중국 지린성 일대를 대홍수로 덮칠 수 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댐이 무너지고 한강이 범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제가 이 수치를 알고 나서 다시 그 장면을 떠올리니 오히려 영화가 절제한 편이었다 싶었습니다.
화산폭발지수(VEI)라는 개념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VEI란 화산 폭발의 규모를 0에서 8까지 수치화한 지표로, 숫자가 1 오를 때마다 분출 규모가 10배씩 커집니다. 946년의 천년 분출은 VEI 7로 추정되며, 이는 인류 역사상 기록된 최대 규모 폭발 중 하나에 해당합니다(출처: 미국 지질조사국 USGS). 영화 속 네 번째 폭발 장면이 왜 그토록 압도적으로 연출됐는지, 숫자를 알고 나면 자연스럽게 납득이 됩니다.
CG 퀄리티와 캐스팅, 기대 이상이었던 것들
영화 초반 강남역 붕괴 장면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한국 영화의 시각 효과는 규모 대비 몰입감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이번엔 그 경계가 확실히 허물어진 느낌이었습니다.
이번 작품의 시각 효과는 덱스터 스튜디오가 담당했습니다. 미스터 고, 신과 함께 시리즈를 작업한 국내 대표 VFX(Visual Effects) 스튜디오입니다. VFX란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실제 촬영 장면에 디지털 효과를 더하는 기술 전반을 가리킵니다. 신과 함께 때와 비교해도 확실히 퀄리티가 한 단계 올라갔다는 느낌이 들었고, CG인지 실제 촬영인지 헷갈리는 장면이 몇 군데 있었습니다.
캐스팅에 대해서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이병헌: 이북 사투리 억양 때문에 대사를 놓치는 경우가 있었지만, 존재감 자체는 영화 전체를 지탱할 정도였습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 이 영화가 흥행을 했다면 그 공로의 절반은 이병헌이라는 배우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 하정우: 웃기고 인간적이고 진솔해 보이는 캐릭터가 정말 리얼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장갑차 안에서의 대사들이 상당 부분 애드리브였다고 하는데, 보면서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 마동석: 지질학 박사 역할로 등장합니다. 근육 사용량이 역대 최저인 대신, 의외로 귀엽고 웃기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굳이 이 역할에 이 배우를 써야 했나 싶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 분위기를 환기하는 역할은 충분히 했습니다.
- 전혜진: 커리어우먼 특유의 카리스마가 있었고, 배수지는 재난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임신부 역할을 담담하게 소화했습니다.
두 주연 배우가 한 작품에서 처음 함께한 조합이라는 점도 흥미로웠습니다. 먹방 신 하나만으로도 극장에서 볼 가치가 있다는 말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재미는 있었지만, 한국 재난영화의 한계는 여전합니다
지루할 틈 없이 봤습니다. 초반부터 바로 백두산이 터져줘서 오히려 깔끔했고, 스케일 자체가 주는 박진감은 충분했습니다. 킬링타임 영화로서는 합격입니다.
다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한국 재난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구도, 즉 남북은 인간적이고 중국과 미국은 악랄하다는 설정이 이번에도 그대로였습니다. 영화적 허용의 범위를 넘어서는 이상화된 인물들이 너무 많았고,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관이 몰입을 방해하는 순간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하정우의 캐릭터는 재밌었지만, 전작 PMC: 더 벙커와 겹치는 결이 있었습니다. 똑같은 군인, 비슷한 재난, 유사한 액션 구조가 반복되다 보면 언젠가는 권태감이 옵니다. 그 시점이 슬슬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결국 백두산은 화려하고 코믹하고 시간이 잘 가는 영화입니다. 단, 긴 여운을 기대하고 들어가면 실망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시즌 가족과 함께 보기에는 무난한 선택이고, 강남역이 무너지는 장면 하나만으로도 극장 입장료가 아깝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술력은 합격, 각본은 여전히 갈 길이 있는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