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동주는 저항 시인인가, 아닌가. 이 논쟁은 영화 '동주'가 개봉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완전히 정리된 적이 없습니다. 저는 그 질문을 처음 진지하게 마주한 게 바로 이 영화 앞에서였습니다. 흑백 화면으로 펼쳐지는 두 청년의 이야기는, 제가 교과서로만 알고 있던 '시인 윤동주'를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게 만들었습니다.
저항시인이라는 수식어, 그 안의 균열
윤동주 시인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하나는 일제강점기에 맞선 저항시인이라는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그는 단지 개인적 성찰을 추구했던 서정 시인이었다는 시각입니다. 저는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당연히 전자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직접 보고 나니, 제가 그동안 얼마나 단편적으로 그를 소비해 왔는지 부끄러워졌습니다. 영화는 그 두 가지 평가 사이에서 어느 한쪽 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대신, 왜 그 논쟁 자체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청년 윤동주의 내면을 통해 천천히 풀어냅니다.
여기서 서정시(抒情詩)란 개인의 감정과 내면세계를 중심으로 표현한 시 형식을 말합니다. 독립운동의 언어가 아니라 '나'의 언어로 쓰인 시. 그렇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윤동주의 시를 저항 의식보다는 내면 고백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문학 비평 분야에서는 작가의 의도와 독자의 해석 사이의 간극을 '의도의 오류(Intentional Fallacy)'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의도의 오류란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의미를 독자가 덧씌울 때 발생하는 해석상의 과잉을 뜻합니다. 윤동주의 시를 저항시로 읽는 것이 과연 그의 의도인지, 아니면 후대가 만들어낸 해석인지를 이 개념으로 생각해 보면 꽤 복잡한 질문이 됩니다.
영화 '동주'가 제목을 '윤동주'가 아니라 '동주'로 정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읽힙니다. 그는 민족 시인이기 이전에, 시를 사랑했던 한 명의 청년이었으니까요.
송몽규라는 거울, 동주라는 질문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강하게 끌린 인물은 사실 윤동주가 아니라 송몽규였습니다. 박정민이 연기한 송몽규는 신춘문예(新春文藝)에 당선될 만큼 문학적 재능을 가졌음에도 그 길을 스스로 접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인물입니다. 여기서 신춘문예란 주요 일간지들이 연초에 신인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개최하는 문학 공모전으로, 당시 문단에서 인정받는다는 상징적 의미가 컸습니다.
몽규를 보면서 저는 계속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영화는 조선인 학생들을 규합해 독립운동을 도모하는 몽규와, 마침내 시집 출판이 눈앞에 다가온 동주를 교차 편집으로 보여줍니다. 그 장면에서 저는 숨을 잠깐 멈췄습니다.
한 사람은 민족을 위해 자신을 던지고, 다른 사람은 평생의 꿈을 이루려 합니다. 이 두 선택 중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가에 대한 질문을 영화는 끝내 답을 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질문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돌려줍니다.
저항운동사 연구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이 경험한 내면 갈등은 단순히 '친일이냐 항일이냐'의 이분법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문학, 예술, 언론 등 문화적 영역에서의 활동이 간접적인 저항의 형태로 기능했다는 분석도 충분히 존재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동주가 조선어로 시를 쓰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저항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영화 속 몽규와 동주는 서로 다른 인물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 안에 공존하는 두 가지 자아처럼 느껴졌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 영화를 두고두고 생각하게 된 가장 큰 이유입니다.
흑백 화면이 담아낸 것들
영화 '동주'는 전체를 흑백 화면으로 촬영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시대적 분위기를 살리기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흑백이 단순한 형식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시네마토그래피(Cinematography) 측면에서 흑백은 색채가 주는 감각적 자극을 제거하고 인물의 표정과 공간의 질감에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여기서 시네마토그래피란 영화의 화면 구성, 조명, 카메라 움직임 등을 포함하는 촬영 예술 전반을 의미합니다. '동주'에서 흑백은 그 시대 청년들의 삶이 얼마나 선택지 없는, 회색조의 세계였는지를 시각적으로 말해주는 장치였습니다.
영화를 본 뒤 저는 한동안 멍하니 자리를 못 떴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동주의 시집 초판본 디자인을 본뜬 책을 직접 사서 처음부터 다시 읽었습니다. 그때 서시(序詩)를 다시 읽는데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읽혔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구절이, 그저 아름다운 다짐이 아니라 너무나도 부끄러웠을 한 청년의 절절한 고백처럼 들렸습니다.
영화의 연출을 맡은 이준익 감독은 사극과 역사 드라마에서 인물 중심의 서사를 풀어내는 데 특히 강점을 보이는 감독입니다. 이번 영화에서는 신연식 감독이 쓴 각본이 그 서사를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는데,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대사 하나하나가 시처럼 쓰였다는 점이었습니다. 간혹 문어체 대사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 어색함마저도 시대의 거리감처럼 느껴져서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습니다.
영화 '동주'를 감상하기 전후로 알아두면 더 풍부하게 즐길 수 있는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윤동주의 대표 시 '서시', '별 헤는 밤', '자화상'을 미리 읽어두면 영화 속 장면들이 훨씬 깊게 다가옵니다.
- 송몽규라는 인물의 실제 생애를 간단히 찾아보면 영화의 후반부가 더 묵직하게 느껴집니다.
- 영화를 본 뒤에는 윤동주 시인의 시를 한 편씩 다시 읽어보세요. 같은 시가 완전히 다르게 읽힙니다.
한국 영화진흥위원회(KOFIC)의 자료에 따르면 '동주'는 2016년 개봉 당시 제한된 상영관 수에도 불구하고 누적 관객 117만 명을 기록하며 독립·예술 영화로서는 이례적인 흥행을 거뒀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그 숫자가 말해주듯, 이 영화는 단순히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라는 감각에 공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닿았습니다.
영화 '동주'를 보고 나서 저는 한동안 스스로에게 계속 물었습니다. 나는 지금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는가.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이 오래 남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면, 이 영화는 분명히 좋은 영화입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가을이든 겨울이든 조용한 날을 골라 꼭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윤동주의 시집 한 권을 옆에 두고 싶어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