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려한 캐스팅에 손익분기점을 일주일 만에 넘긴 영화가 정작 극장보다 안방극장에 더 어울린다면 어떻게 봐야 할까요? 2017년 개봉한 범죄 영화 <꾼>은 현빈, 유지태, 박성웅, 나나, 배성우가 한 화면에 모인 것만으로도 큰 화제를 모았던 작품입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 든 첫 느낌은 딱 하나였습니다. '한국판 오션스 일레븐을 만들려다 절반쯤 완성해 버린 영화.'
조희팔 실화 모티브와 화려한 캐스팅이 만든 초반의 흡인력
영화 <꾼>의 배경을 알고 보면 이야기가 전혀 달리 보입니다. '장두칠'이라는 극 중 인물은 2008년에 국내 최대 규모의 다단계 금융 사기를 벌인 조희팔 사건에서 이름만 바꾼 캐릭터입니다. 수만 명에 달하는 피해자를 낳고 극단적 선택을 한 이들이 속출했으며, 주동자가 해외에서 사망했다는 공식 발표가 나왔음에도 여전히 '사망 조작설'이 끊이지 않는 희대의 사건이죠.
실제 수익 없이 오직 신규 투자자의 자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배당을 주는 이 비정한 폰지 사기 구조를 영화는 그대로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가 정말 살아있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대중적인 의문과 감정적 공백에서 출발하죠. 완전한 허구보다 '이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라는 전제가 주는 힘은 관객의 몰입도를 단숨에 끌어올립니다. 개봉 일주일 만에 손익분기점을 돌파한 데는 이 생생한 실화의 무게감과 초호화 캐스팅이 완벽한 시너지를 낸 덕분일 것입니다.
편집과 촬영의 질 역시 분명히 높습니다. 장면 전환이 빠르고 세련되었으며, 대중이 원하는 배우들의 매력적인 비주얼을 아주 잘 살려냈습니다. 특히 스크린 데뷔작이었던 나나의 연기는 예상 밖으로 자연스러웠고, 박성웅과의 묘한 케미스트리는 영화에서 몇 안 되는 생동감 넘치는 명장면을 만들어내며 범죄 코미디 특유의 리듬을 확실하게 살려놓습니다.
주객이 전도된 캐릭터와 관객만 따돌리는 반전의 남용
하지만 세련된 포장지를 한 꺼풀 벗겨내면 서사의 뼈대에서 아쉬움이 튀어나옵니다. 범죄자가 주인공인 장르일수록 인물이 이야기를 거치며 겪는 도덕적·심리적 변화의 궤적이 분명해야 현실의 거부감을 지우고 관객의 응원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주인공인 현빈의 캐릭터는 이 변화의 곡선이 너무나 희미합니다.
오히려 제 시선이 계속 쏠린 곳은 빌런에 가까운 유지태의 박희수 검사 쪽이었습니다. 권력의 앞잡이이면서도 필요하다면 배반도 서슴지 않는 입체적인 면모 덕분에, 박희수가 극 전체를 실질적으로 리드하는 기이한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현빈의 캐릭터에도 사연은 있지만, 그의 행동을 설득할 만큼 충분히 묘사되지 않다 보니 주인공이 빌런보다 더 유약하거나 매력 없게 보이는 아이러니가 발생합니다. 시나리오가 캐릭터를 입체적인 인간이 아닌, 그저 사건을 굴리기 위한 도구로만 소비한 결과입니다.
여기에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빠지는 가장 큰 원인은 반전의 남용에 있습니다. 훌륭한 반전이란 앞서 배치된 복선들이 정교하게 뒤집힐 때 찌릿한 쾌감을 주는 법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반전은 관객과 밀당을 하며 함께 속는 것이 아니라, 관객만 일방적으로 따돌리고 속여버립니다. 앞서 공들여 보여준 장면을 나중에 "사실 그건 다 연기였습니다"라며 쉽게 무효 처리해 버리니, 관객 입장에서는 단서를 놓친 게 아니라 애초에 단서가 없었던 꼴이 되어 카타르시스 대신 허탈감만 남게 됩니다. 개연성과 논리적 근거가 단단히 뒷받침되어야 할 범죄물에서, 그저 반전 엔딩이라는 흥행 공식에 지나치게 집착하다가 서사의 구멍을 자초한 셈입니다.
독창성의 한계, 그럼에도 훌륭한 킬링타임용 홈 시네마
이처럼 <꾼>은 기술적인 세련미는 높지만, 이야기의 논리적 일관성과 감정적 설득력이라는 서사적 완성도에서는 뚜렷한 한계를 보입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극장에서 비싼 티켓 값을 지불하고 보기에는 묵직한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주말 저녁에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들고 거실 소파에 누워 편하게 즐기기에는 이만한 오락 영화도 드뭅니다.
코미디 요소가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어 배우들의 매끄러운 팀플레이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고, 이야기 구조가 복잡하지 않아 잠깐 딴청을 부리며 부담 없이 보더라도 흐름을 놓칠 염려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과거 한국 범죄 영화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범죄의 재구성>이나 <타짜> 같은 웰메이드 케이퍼 무비들의 잔상이 자꾸 겹쳐 보여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인상은 피하기 어렵지만, 장르 영화가 주는 대리 만족의 쾌감만큼은 절반쯤 확실하게 보장합니다.
결국 영화 <꾼>은 기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작품입니다. 촘촘한 내러티브와 깊이 있는 캐릭터 플레이를 기대한다면 겉멋만 든 영화로 보이겠지만, 화려한 배우들의 얼굴 합과 가볍고 빠른 범죄 오락의 재미를 원한다면 훌륭한 선택지가 됩니다. 이미 장르물을 많이 섭렵하신 베테랑 관객분들이라면 눈높이를 조금 낮추고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하시길 권하며, 유지태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배우들의 케미스트리만으로도 한 번쯤 킬링타임으로 털어내기엔 충분한 영화임은 틀림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