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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시트 리뷰 (재난영화, 페이소스, 한계)

by yooniyoonstory 2026. 4. 27.

엑시트 영화 포스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2019년 여름, 재난영화라는 장르 앞에 코미디와 청춘 드라마를 버무린 영화가 942만 관객을 끌어모을 거라고 누가 예상했을까요. 저도 처음엔 "그냥 가볍게 보는 여름 블록버스터겠지" 하고 넘겼는데, 나중에 이 영화에 숨겨진 제작 비화들을 하나씩 알아갈수록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그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재난영화로서의 자격 검증

일반적으로 재난영화라고 하면 대규모 피해 장면, 즉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쓸려나가는 재난 스펙터클(disaster spectacle)이 장르의 핵심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재난 스펙터클이란 재난의 물리적 규모를 시각적으로 압도적으로 표현하는 연출 방식을 뜻합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 기준으로 엑시트를 들여다보면, 솔직히 점수가 후하게 나오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재난의 물리적 설득력입니다. 소형 카고 트럭에 실린 용기 하나에서 방출된 독가스가 도심 전체를 뒤덮는다는 설정은, 기체역학(gas dynamics) 관점에서 도저히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기체역학이란 기체의 흐름과 확산 특성을 다루는 물리학 분야로, 기체는 퍼질수록 밀도가 급격히 낮아진다는 게 기본 원리입니다. 중학교 과학 시간에 졸면서 들어도 아는 내용이 영화 안에서는 무시됩니다. 그 정도의 가스 양으로 서울 도심을 뒤덮으려면 당인리발전소가 하루 종일 석탄을 태우는 수준의 스케일은 돼야 그나마 근접한 설정이 될 텐데, 영화는 그냥 넘어갑니다.

그렇다고 이게 치명적인 결함이냐 하면,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엑시트는 애초에 재난의 사실적 재현보다 재난이라는 상황을 활용한 탈출 서사에 방점을 찍은 영화입니다. 재난영화의 클리셰, 즉 안전 불감증인 고위 공무원이나 무능한 관료 집단이 등장해 관객의 속을 뒤집어놓는 빌런 구도도 없습니다. 오히려 재난 문자를 빠르게 발송하고 현장에 즉각 투입되는 구급 대원들, 물이 독가스를 중화한다는 사실을 밝혀내 살수 작업에 돌입하는 공무원들이 나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장면에서 오히려 뭔가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속 터지는 장면 없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게 이렇게 편할 줄은 몰랐거든요.

조정석과 윤아의 페이소스, 그 땀과 눈물의 실체

이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탈출 액션보다 두 배우의 페이소스(pathos)라고 느꼈다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겁니다. 여기서 페이소스란 연기나 서사를 통해 관객에게 감정적 공감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를 뜻합니다. 엑시트는 포스터부터 두 사람이 울고 있고, 영화 내내 극한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을 자주 보여줍니다.

그런데 제가 주목한 건 이 눈물이 신파의 조미료로 쓰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한국 상업영화에서 신파(新派)란 관객의 감정을 억지로 자극하는 과잉 연출 방식을 가리키는 데, 엑시트의 눈물은 그 범주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극한의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생리적 반응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관객은 이 눈물에 동참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런 상황이라면 나도 그럴 수 있겠다"는 객관화가 가능하고, 그래서 오히려 영화를 부담 없이 따라갈 수 있습니다.

더 들여다보면 제작 과정 자체가 이 영화의 진정성을 뒷받침합니다. 조정석은 팔 근육을 드러내기 위해 음주를 자제하며 직접 몸을 만들었고, 15m 높이 세트에서 3일간 혼자 등반 장면을 찍으며 실제로 어깨 근육이 눈에 띄게 발달했다고 합니다. 외벽 등반에 쓰인 홀드 배치는 프리클라이밍(free climbing) 선수의 고증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프리클라이밍이란 인공 장비에 의존하지 않고 손과 발만으로 암벽을 오르는 스포츠입니다. 이렇게 배우의 실제 신체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낸 덕분에 스턴트 대역 없이 본인이 직접 해낸 장면들이 상당수 있고, 그 결과로 화면에서 느껴지는 설득력이 달라집니다. 윤아 역시 덤벨이 버티는 58kg의 무게 설정 속에서 대역 없이 한 테이크로 건너가는 장면을 완주했습니다.

엑시트 제작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현장 디테일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용남의 방은 세트로 제작해 롱테이크 촬영이 가능했고, 양갱·수석·담근 주 같은 소품은 미술팀이 자체 설정해 배치했습니다.
  • 실제 모스 부호로 SOS를 표현했으며, 사람들이 서 있는 위치로 HELP의 'H'를 형상화했습니다.
  • 쓰레기봉지로 만든 방호복은 실제 비닐을 입고 춘천 시내에서 전력 질주해 촬영했고, 화장실을 갈 때마다 옷을 찢어야 했습니다.
  • 옥상 외부 홀드 배치는 클라이밍 선수의 실제 고증을 받아 현실성을 확보했습니다.

942만의 이유, 그리고 한계

일반적으로 영화 흥행의 공식은 완성도에서 나온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엑시트는 그 공식을 비껴간 케이스입니다. 2019년 국내 박스오피스는 천만 관객 영화가 다섯 편이나 배출된 이례적인 해였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그 속에서 942만 관객을 동원한 엑시트는 어떤 측면에서는 결과가 아쉬운 영화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라갔는지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스토리텔링 구조상 약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위기 발생 → 탈출 → 새 위기 발생 → 재탈출로 이어지는 패턴이 반복되다 보니 중반부를 넘어서면 피로감이 쌓입니다. 세트와 CG의 완성도가 고르지 않아 몰입이 끊기는 장면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흥행한 건 결국 20~30대 관객의 공감 코드를 정확히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한국 영화 관람객의 연령대별 분포를 보면 20~30대가 전체 관람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백수인 주인공,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직장인 선배, 그리고 드론으로 탈출극을 생중계하며 함께 응원하는 또래들의 모습은 극 안에서 하나의 세대 감수성을 형성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영화에 지나치게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시각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엑시트는 사회 비판적 어젠다를 내세우는 영화가 아니고, 카메라의 시선이 시종일관 조정석과 윤아 두 사람에게만 고정돼 있습니다. 영화 일부에 담긴 세대론적 요소를 작품 전체의 주제로 끌어올리는 건 과잉 해석에 가깝습니다. 가볍고 유쾌하게 보다 보면 어느 순간 의외로 마음이 찡해지는 순간이 오는 영화,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엑시트를 아직 못 본 분이라면 디테일을 알고 본 후에 다시 봐도 재미가 살아있는 영화입니다. 제작 비화들을 숙지한 뒤에 장면 하나하나를 따라가 보면, 촬영 현장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치열하게 만들어졌는지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치열함이야말로 이 영화가 9백만 클럽에 든 진짜 이유에 가장 가까울 것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reLUJCzE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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