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봉 전부터 별점이 내려가는 걸 눈으로 보면서도 결국 극장 좌석을 예매했거든요. 유민상 씨가 말했던 "아는 맛이 제일 무섭다"는 말이 딱 제 상황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아는 맛은 여전히 그 아는 맛이었습니다.
액션 연출: 허명행 감독, 기대와 우려 사이
범죄도시 4를 보기 전에 허명행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황야를 먼저 봤습니다. 제가 직접 봐놓고 솔직히 걱정이 앞섰습니다. 무술 감독 출신답게 액션 신은 확실히 뽑아내는데, 인물 간의 심리 묘사나 관계의 밀도가 조금 얇게 느껴졌거든요.
이번 범죄도시 4에서도 그 아쉬움은 어느 정도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시리즈 특유의 암묵적 내러티브 구조, 쉽게 말해 빌런 등장, 약자의 피해, 마석도의 분노와 응징으로 이어지는 공식 플롯이 이미 관객과의 불문율처럼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크게 치명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역시 비행기 퍼스트 클래스 액션 시퀀스입니다. 시퀀스(sequence)란 하나의 극적 단위로 묶이는 연속된 장면들을 뜻하는 영화 용어인데, 이 장면은 좁은 공간이라는 물리적 제약을 오히려 긴장감으로 변환시킨 연출이었습니다. 실제로 교육용 비행기 세트를 통째로 빌려 액션 동선에 맞게 내부를 재구성했다고 하는데, 그 공간 활용이 스크린에서도 충분히 느껴졌습니다.
허명행 감독이 설계한 롱테이크 액션도 주목할 만합니다. 롱테이크(long take)란 편집 없이 카메라가 길게 찍어나가는 기법으로, 컷을 자르지 않기 때문에 배우와 무술 팀의 실력이 그대로 노출됩니다. 범죄도시 시리즈는 매 편마다 이 롱테이크 액션을 하나씩 넣어왔는데, 이번 편도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습니다.
빌런의 한계: 백창기는 왜 아쉬웠나
이번 시리즈 빌런 백창기 역을 맡은 김무열의 연기력은 분명히 출중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연기력 좋은 배우가 평면적인 캐릭터를 맡으면 오히려 더 아쉬움이 커지더라고요. 백창기가 딱 그랬습니다.
냉혹하고 기술적인 살인 전문가라는 설정, 거기에 칼을 찌른 후 숨이 끊어질 때까지 지켜보는 취미까지. 캐릭터의 잔혹성을 쌓아 올리는 디테일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을 건드리는 장면은 거의 없었습니다. 반지를 건 목걸이처럼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는 암시가 스쳐 지나갔지만, 관객이 실제로 캐릭터에 몰입할 만큼 깊이 파고들지는 못했습니다.
1편의 장첸, 2편의 강해상이 보여줬던 무게감을 떠올리면 아쉬움이 더 진하게 남습니다. 윤계상과 손석구가 만들어냈던 카리스마는 단순히 잔인함에서 나온 게 아니라 캐릭터의 내적 논리와 존재감에서 비롯된 것이었거든요. 이번 빌런에서 그 부분이 얕다고 느낀 건 저만이 아닐 것 같습니다.
빌런 캐릭터 비교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1편 장첸(윤계상): 조직 논리와 공포의 균형, 강렬한 첫 등장신
- 2편 강해상(손석구): 사이코패스적 매력과 내러티브 밀도
- 4편 백창기(김무열): 기술적 잔인함은 있으나 캐릭터 내면의 레이어 부족
조력자로 등장한 장동철 역의 이동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동휘의 코믹한 연기 자체는 재미있었지만, 보스 캐릭터로서의 위협감은 처음부터 거의 없었습니다. 개봉 이후 한국 영화 흥행 데이터를 보면 범죄도시 시리즈 누적 관객 수가 4편 합산 4천만 명을 돌파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이런 기록적인 시리즈일수록 빌런의 완성도가 시리즈 전체의 품질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이번 선택은 아쉬운 부분으로 남습니다.
장이수가 살린 후반부, 그리고 새 얼굴들
제가 극장에서 처음 웃은 게 언제였냐면, 장이수가 차창 너머로 마석도 형사의 영업 회유 장면을 지켜보던 바로 그 표정이었습니다. 그전까지 솔직히 웃음이 안 나와서 조용히 숨만 쉬고 있었는데, 그 장면에서 얼어 있던 마음이 슬며시 풀렸습니다.
박지환이 연기하는 장이수는 존재 자체가 유머 코드입니다. FDA라는 가짜 조직 이름도 그렇고, FDA는 보통 미국 식품의약국(Food and Drug Administration)의 약자인데, 영화에서는 폴리스 다크 아미(Police Dark Army)라는 가상 조직명의 약자로 희화화됩니다. 이 언어유희가 의외로 깔끔하게 웃겼습니다.
장이수 캐릭터가 매력적인 이유는 단순히 웃기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마석도와 축적된 관계, 그 맥락이 있기 때문에 등장만으로도 따뜻한 웃음이 나오는 겁니다. 새롭게 합류한 캐릭터들도 거슬리지 않게 녹아들었습니다. 사이버수사대 한지수 역의 이주빈은 디지털 포렌식(digital forensics), 즉 디지털 기기에 남겨진 데이터를 수집·분석해 범죄 증거를 확보하는 수사 기법을 다루는 캐릭터로 등장해 기존 팀의 물리적 액션과 다른 결의 긴장감을 만들어냈습니다.
실제로 공항 감시 카메라로 신체 데이터를 실시간 대조해 범인을 찾는 장면은 단순한 영화적 상상이 아닙니다. 생체인식 기반의 용의자 추적 시스템은 이미 여러 국가의 공항 보안 현장에 도입되어 있으며, 국내에서도 관련 연구와 시스템 도입이 논의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정보화진흥원(NIA)). 이런 설정이 고증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 영화의 현실감을 한 층 높여준 요소였습니다.
범죄도시 4는 8편까지 계획된 시리즈의 중간 지점입니다. 이번 편에서 빌런 캐릭터의 입체성 부족이 아쉬웠던 만큼, 앞으로의 시리즈가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지가 더 궁금해집니다. 소문처럼 다음 편 메인 빌런으로 유지태가 등장한다면, 마동석의 피지컬에 버금가는 존재감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범죄도시 4는 새로운 걸 기대하고 들어가면 실망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전작을 재미있게 봤고, 극장에서 통쾌하게 주먹 소리 한 번 듣고 싶다면 충분히 그 값어치는 합니다. 초반부의 차가운 분위기를 버텨내고 장이수가 등장하는 순간부터는 분명히 다른 영화가 됩니다. 독자분들은 초반에 좀 졸리더라도 자리를 지키시길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