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20년 개봉 당시, 전 세계 영화 팬들을 충격에 빠뜨린 평론가 신선도 지수가 있었습니다. 고작 14%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 든 작품은 바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아이언맨'의 슈트를 벗어던진 후 처음으로 선택한 복귀작, 영화 <닥터 두리틀>이었습니다. 저 역시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이 작품을 감상했는데, 14%라는 수치가 다소 과하다 싶으면서도 영화가 끝나갈 때쯤에는 어느 정도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매력적인 세계관, 그러나 헐거웠던 가상 세계의 규칙들
영화 <닥터 두리틀>은 동물과 실제로 소통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의사라는 독특하고 환상적인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영국 여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거대한 저택과 동물 보호구역을 하사 받은 인물이지만, 사랑하는 아내 릴리를 바다에서 잃은 뒤 세상과 완전히 담을 쌓고 은둔 생활을 이어갑니다. 깊은 상처로 인해 자신의 능력을 봉인했던 주인공이 예기치 못한 사건을 계기로 다시 세상 밖으로 발을 내딛는 서사는, 우리가 익히 봐온 전형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영웅의 귀환 공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영국의 여왕이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지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오릅니다. 유일한 치료제를 구하기 위해 전설의 섬 몬테베르데를 향해 돛을 올리는 여정은 모험 플롯의 정석을 보여줍니다. 겁쟁이 고릴라 치치, 수다쟁이 앵무새 폴리, 엉뚱한 북극곰 야시 등 다채로운 동물 크루들이 합류하며 영화가 설정한 세계관은 어린 시절 한 번쯤 꿈꿔봤을 법한 판타지를 자극합니다.
하지만 판타지 장르에서 가장 중요한 '가상 세계의 촘촘한 규칙과 역사적 논리'라는 측면에서 보면 아쉬움이 큽니다. 모든 동물이 인간 및 서로와 완벽하게 소통하는 과정의 개연성, 총을 맞고도 지나치게 멀쩡한 다람쥐의 모습, 전설의 섬에 얽힌 거대한 신화적 배경 등 관객이 세계관에 자연스럽게 몰입하도록 돕는 최소한의 설명조차 생략된 채 지나치게 편의주의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겉도는 캐릭터와 헐거운 서사, 각본이 남긴 아쉬움
스크린을 보며 가장 진하게 남았던 아쉬움은 넘쳐나는 캐릭터들에 비해 개개인의 서사가 너무나 빈곤하다는 점이었습니다. 동물 캐릭터들의 종류는 화려하고 많지만, 각각의 매력과 존재 이유가 선명하게 살아나지 못합니다. 앵무새나 고릴라 등 개성 있는 속성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극이 전개될수록 하나의 주체적인 캐릭터라기보다는 그저 화면 및 배경을 요란하게 채우는 시각적 요소에 머무는 인상이 강합니다.
이야기 안에서 등장인물이 내면적으로 성장하고 변화하는 흐름도 헐겁습니다. 주인공인 두리틀이 슬픔을 극복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서는 중심 서사는 겨우 중심을 잡고 있지만, 그를 보좌하는 주변 동물들의 내면적 성장은 거의 부재하다시피 합니다. 대사와 화면은 쉴 새 없이 바쁘고 시끄럽게 흘러가는데, 정작 관객의 마음에 묵직하게 남는 감정적 클라이맥스가 부족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타이틀롤을 맡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연기를 두고도 평이 극명하게 갈렸습니다. '토니 스타크'를 통해 보여주었던 특유의 압도적인 카타르시스와 세련된 입담을 기대했던 성인 관객들에게는 분명 실망스러운 행보였을 것입니다. 난잡하게 얽힌 플롯 속에서 메인 캐릭터인 두리틀마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 강한데, 이는 배우의 역량 문제라기보다는 각본의 구조적 한계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인물의 행동 동기와 사건의 인과관계가 헐겁고 감정선이 뚝 뚝 끊기다 보니, 용서와 화해라는 감동적인 순간에도 관객이 충분히 이입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누구와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영화의 진짜 가치
그렇다면 <닥터 두리틀>은 정말 아무런 가치도 없는 실패작일까요? 저는 그렇게 단정 짓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영화는 누구와 함께 극장 문을 열었느냐에 따라 평가가 완전히 뒤바뀔 수 있는 작품입니다. 만약 어린 자녀들과 함께 주말에 즐길 가족 단위의 영화를 찾고 있다면, 이 작품은 꽤 훌륭한 선택지가 됩니다.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소소한 유머 포인트가 곳곳에 포진해 있고,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정교하게 구현해 낸 동물들의 CG 비주얼은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어린이 관객들의 반응은 매우 열렬한 편입니다.
결국 이 영화의 진짜 패착은 '주요 타깃 연령층'의 설정과 마케팅의 미스매치에 있습니다. 영화의 내실은 명백히 어린이와 가족 관람객을 겨냥한 아동용 판타지인데, 마케팅 전면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는 세계적인 아이콘을 내세우면서 성인 영화 팬들의 눈높이를 '어벤져스 급'으로 올려놓은 것입니다. 기대 수준이 영화의 실제 성격에 비해 과도하게 높아진 탓에 역풍을 맞은 셈입니다.
따라서 각본의 치밀한 개연성이나 깊이 있는 캐릭터의 성장을 기대하는 성인 관객이라면 실망감이 크겠지만, 화려한 동물 CG의 비주얼을 즐기거나 아이들에게 환상적인 모험을 선물하고 싶은 부모님들에게는 무난하고 안전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닥터 두리틀>은 한 줄로 요약하자면 어린아이들과 함께라면 더없이 무난한 선택, 어른 혼자라면 기대를 내려놓고 들어가야 할 팝콘 무비입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아이언맨 이후 첫 행보라는 점에서 남긴 아쉬움은 있지만, 그의 새로운 출발을 확인했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싶습니다. 참고로 크레딧이 올라가는 중간에 유쾌한 쿠키 영상이 한 개 준비되어 있으니,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며 여운을 즐기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