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에 개봉한 영화가 2012년 작품처럼 느껴진다면,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요? 영화 <국제수사>는 무려 제작비 90억 원을 투입한 코미디 액션 영화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영화 초반부에 밀려오는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 잠들어버렸고, 깜짝 놀라 일어나 시계를 봤을 때 이미 극이 한참 진행되어 있어서 허탈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끈기를 가지고 끝까지 관람을 마쳤는데, 다 보고 나니 아쉬움 속에서도 몇 가지 볼 만한 구석과 함께 깊은 씁쓸함이 남았습니다.
90억짜리 스케일, 10년 전 명절 공식에 갇히다
충무로에서 제작비 90억 원이라는 수치를 들으면 관객은 자연스럽게 화려한 볼거리와 묵직한 스케일을 기대하게 마련입니다. 저 역시 내심 유럽이나 화려한 도심을 배경으로 한 글로벌 스케일의 추격전을 상상했었죠.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영화의 주 무대는 필리핀이었습니다. 현지 로케이션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이국적인 풍광을 깔아 두고도 결국 속을 들여다보면 한국인들끼리 쫓고 쫓기며 보물 찾기를 하다가 뻔한 우정을 확인하는 전형적인 옛날식 이야기 구조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개봉 연도를 모르고 봤다면 대략 2012년이나 2013년쯤 만들어진 명절용 영화겠거니 했을 텐데, 2020년 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꽤 당황스러웠습니다. 한국 코미디 영화가 짚어온 온갖 식상한 전개 방식이 이 작품에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생 평범하게 살던 주인공이 빚더미에 시달리다 우연히 해외 여행길에서 거대한 사건에 휘말리고, 결국엔 눈물겨운 의리와 우정으로 갈등을 봉합하는 결말은 이미 10년 전 극장가에서 수없이 봐왔던 낡은 공식과 다를 게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편안하고 익숙한 코미디 장르가 명절 연휴 기간에 유독 관객들의 선택을 많이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가볍게 웃고 즐길 수 있는 고유의 장르적 수요가 꾸준하다는 반증이기도 하겠죠. 하지만 대중이 친숙하게 여긴다고 해서 영화의 완성도나 신선함에 대한 고민 없이 안주해도 된다는 면죄부가 되지는 않습니다. 1시간 46분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러닝타임임에도 불구하고, 야마시타 골드라는 흥미로운 역사적 소재를 너무 얕게 소모해 버린 탓에 체감 시간은 훨씬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습니다.
매력적인 빌런의 실종과 캐릭터 설정의 붕괴
좋은 오락 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인물이 가진 매력이 끝까지 유지되어야 하는데, <국제수사>는 캐릭터들이 영화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중심을 잡지 못하고 쉽게 무너져 내립니다. 이 아쉬운 균형 붕괴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인물이 바로 배우 곽도원과 대적하는 악역 '패트릭(김희원 분)'이었습니다.
패트릭이 극에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압도적인 총 솜씨와 자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혈한 분위기를 풍기며 상당한 긴장감을 불어넣었습니다. 제가 직접 집중해서 본 그 등장 신만큼은 빌런으로서의 포스가 꽤 인상적이었거든요. 하지만 그 강렬함도 잠시,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패트릭은 그저 허당기 가득한 평범한 악당 아저씨로 전락해 버립니다. 초반에 무시무시하게 설계해 둔 매력적인 빌런을 시나리오의 한계 때문인지 뒷감당을 못 하고 방치해 버린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주인공을 인질로 잡고서도 긴장감 넘치는 협상력을 발휘하긴커녕, 어설픈 소동극 속에서 허무하게 무너지고 마니까요.
그나마 다행인 점은 김상호 배우가 연기한 '황만철' 캐릭터가 설정의 흔들림 없이 극의 중심을 뚝심 있게 지탱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김상호 배우의 연기를 볼 때마다 유쾌하고 가벼운 인물 속에서도 문득 뿜어져 나오는 날 선 리얼리티가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그 특유의 강약 조절이 살아 있어 보는 재미를 더했습니다. 주연 배우 곽도원 씨의 연기 내공 역시 탄탄했지만, 그가 연기한 '홍병수'라는 인물이 가진 갈등이 너무 쉽게 풀려버린 점은 여전히 아쉽습니다. 돈 때문에 인생의 밑바닥까지 가고 오랜 관계들이 처절하게 흔들리는 설정을 무겁게 깔아놓고는, 결말에 이르러 "숨겨진 황금을 찾았으니 모두 행복하게 끝"이라는 식으로 얼렁뚱땅 봉합해 버리니 인물의 내적인 성장이나 진중한 선택을 기대했던 관객 입장에서는 허탈할 수밖에 없습니다.
코미디라는 이름 뒤에 숨은 위험한 시선
사실 이 영화를 보며 가장 진지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었던 지점은 따로 있습니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필리핀이라는 국가를 치안이 극도로 불안정하고 공권력이 부패한 낙후된 공간으로만 반복해서 묘사합니다. 그리고 그 씁쓸한 편견 위에 슬랩스틱과 유머를 얹어 관객을 웃기려고 시도하죠.
대상을 유쾌하게 비틀어 웃음을 주는 풍자와 그저 특정 대상을 깎아내리는 차별적 묘사는 엄연히 한 끗 차이의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풍자가 성립하려면 뚜렷한 맥락과 방향성이 있어야 하며,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비판하느냐가 명확해야 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도 다문화 시대에 접어들며 외국인을 대하는 미디어의 표현 방식이나 차별적 묘사에 대한 대중의 민감도가 몰라보게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개봉한 영화가 여전히 특정 국가를 희화화하고 인종차별적인 성격의 개그를 반복적으로 배치했다는 것은 시대를 제대로 읽지 못한 아쉬운 선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 역시 코미디라는 장르 안에서 허용되는 유머의 범위를 꽤 넓게 열어두고 보는 편이라, 단순히 개그의 수위 자체가 문제라고 단정 짓고 싶지는 않습니다. 진짜 문제는 맥락의 부재입니다. 한국인이 제작한 영화에서 한국인 캐릭터들이 타국을 은근히 깔아뭉개는 뉘앙스의 개그를 치는데, 이를 객관적으로 비판하거나 스스로 되돌아보게 만드는 장치가 극 안에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여기는 필리핀이니까 당연히 이렇다"는 식으로 퉁치고 넘어갈 뿐이죠. 코미디라는 장르가 모든 무례한 표현을 덮어주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아슬아슬한 선을 타는 유머를 선보이고 싶었다면, 그에 걸맞은 영리한 맥락과 연출적 장치가 단단히 받쳐주었어야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국제수사>는 여러모로 어정쩡한 위치에 서 있는 영화입니다. 본격 코미디로 보기엔 타율 높은 웃음이 부족하고, 액션 블록버스터로 보기엔 스케일이 작으며, 휴먼 드라마로 보기엔 인물들의 성장 서사가 너무나 얄팍합니다. 가볍게 머리를 비우고 시간을 때우는 킬링타임용 영화라는 점은 부정하지 않겠지만, 한국 코미디 영화의 발전이라는 거시적인 측면에서는 진한 아쉬움과 숙제를 남긴 작품입니다. 비슷한 포맷의 영화를 감상하실 예정이라면, 부디 기대치를 많이 낮추고 편안한 마음으로 접하시길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