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아이가 살인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라면, 그 증언은 법정에서 효력이 있을까요? 2019년 개봉한 영화 '증인'을 보면서 저는 이 질문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영화가 끝나고 나서 제 머릿속에 가장 크게 남은 건 법정 공방이 아니라, 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는 어른의 모습이었습니다.
드라마 우영우와 연결되는 뜻밖의 배경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 영화를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먼저 본 이후에 봤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자꾸 우영우가 오버랩됐고, 영화가 끝나자마자 두 작품의 연관성을 찾아봤습니다.
알고 보니 두 작품 모두 문지원 작가가 쓴 작품이었습니다. 시기상으로는 영화가 먼저입니다. 그리고 영화 속 임지우라는 소녀가 커서 변호사가 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것이 드라마 우영우였다고 합니다. 제가 직접 찾아본 내용인데,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영화를 다시 되짚어보니 두 작품의 말투나 대사가 정말 비슷하다는 게 확 느껴졌습니다. 우영우를 먼저 본 분들이라면 분명히 같은 감각을 받으실 겁니다.
흥행 성적을 보면 두 작품 사이의 온도 차가 꽤 느껴집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2022년 방영 당시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크게 끌어올리며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란 사회적 의사소통과 상호작용에 어려움을 겪으며, 반복적 행동 패턴을 보이는 신경발달 장애를 통칭하는 개념입니다. 반면 영화 '증인'은 누적 관객 수 약 253만 명을 기록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흥행에 실패한 건 아니지만 드라마만큼의 파급력은 아니었죠. 드라마를 먼저 보고 영화를 본 저로서는, 순서가 반대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자폐 스펙트럼을 다루는 이 영화만의 태도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연기도, 법정 씬도 아니었습니다. 자폐를 바라보는 영화의 태도였습니다.
기존 국내 장애 관련 영화들을 보면 장애를 가진 인물이 동정의 대상이 되거나, 심하면 희화화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데 '증인'은 달랐습니다. 임지우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지우의 눈에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관객이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장치를 통해 설명해 줍니다. 청각에 극도로 예민한 지우의 특성,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특성, 한번 본 것을 잊지 못하는 특성 등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방식이 좋았습니다.
실제로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법정 증인으로 채택될 수 있는지 여부는 증언 능력(testimonial competence), 즉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고 기억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에 따라 판단됩니다. 증언 능력이란 법정에서 진술하는 사람이 해당 사건을 충분히 인식하고 그것을 전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지·언어 능력을 갖추었는지를 평가하는 개념입니다. 영화 속에서 지우의 증언 채택 여부를 둘러싼 공방이 실제 법리 논쟁을 꽤 충실하게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영화가 자폐를 다루며 잘 지킨 원칙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장애를 동정의 시선이 아닌 이해의 시선으로 접근합니다.
- 자폐 스펙트럼의 다양한 특성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 장애인 캐릭터를 플롯 도구가 아닌 독립적인 인물로 그려냅니다.
- 관객이 지우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걸어 들어갈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김향기 배우의 연기력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웃기려고 작정하지 않았는데 극장 안이 몇 번씩 터지는 장면들, 그게 전부 김향기 배우가 만들어낸 순간들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연기는 억지로 흉내 낼 수가 없는 종류입니다.
법정 드라마로서의 완성도와 아쉬운 점
법정 드라마(court drama)의 핵심은 긴장감 있는 공방과 그 안에서 드러나는 인물의 신념입니다. 법정 드라마란 법정 안팎의 공방을 중심 서사로 삼아 진실 규명과 인물 갈등을 동시에 그려나가는 장르를 말합니다. 이 영화는 법정 씬에서 집중력 있는 긴장감을 충분히 보여줬습니다.
정우성 배우가 연기한 순호는 대형 로펌 소속 파트너 변호사이면서도 국선 변호인을 맡아 억울한 피의자를 돕는 인물입니다. 파트너 변호사(partner attorney)란 로펌 내에서 수익을 공유하고 경영에 참여하는 고위직 변호사를 의미하며, 일반 소속 변호사보다 상위 직급입니다. 순호가 화려한 대형 로펌의 지시와 자신의 신념 사이에서 흔들리는 내적 갈등은 영화 전체에 묵직한 무게를 더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법조인의 타락이나 유혹을 표현하는 방식이 늘 술자리와 여성 접대로 귀결되는 패턴, 이건 이 영화도 피해 가지 못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 패턴이 반복될 때마다 매번 같은 한계를 느낍니다. 또 생리대 발암물질 소송 같은 실제 사회적 사건을 배경으로 넣으면서 권력에 맞서는 신념의 무게를 표현했는데, 그 신념이 흔들렸다가 다시 세워지는 과정이 좀 더 섬세하게 그려졌다면 어땠을까 싶었습니다.
정우성 배우의 연기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격한 감정씬에서는 다소 어색한 순간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극 전체의 흐름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고, 오히려 김향기 배우의 연기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됐다는 게 제 솔직한 감상입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과 관련하여, 국내에서는 보건복지부가 발달장애인 지원 정책을 꾸준히 발전시켜 오고 있습니다(출처: 보건복지부). 이 영화 한 편이 그런 사회적 논의에 작은 물꼬를 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잔잔하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은 영화입니다. 중간중간 예상치 못한 웃음과 감동이 있고, 오글거리는 장면이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본 걸 후회하지는 않을 작품입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인상 깊게 보셨던 분들이라면 두 작품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며 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가능하다면 영화를 먼저 보시길 권합니다. 저처럼 순서가 바뀌면 영화 내내 우영우가 겹쳐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될 수 있으니까요.
이 글은 개인적인 감상과 경험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법률 또는 의학적 조언이 아닙니다.